남하꼬

돌이켜보면 운이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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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송은 3월이었다.


재미있게 하던 게임으로 방송을 켰다.


아주 마이너한 게임이지만, 돌이켜보면 더할 나위 없는 정답이었다.


방송 시작 전에는 '너무 마이너한 게임이니까 딴 거 하는 게 낫겠지?'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정말 그리 했으면 오늘의 방송을 하는 나는 없었을 거다.



방송이 시작됐다.


장비는 2년 된 70만원짜리 컴퓨터, 3만원짜리 마이크, 5만원짜리 캠. 그게 전부.


요즘 시청자분들의 눈에 들기에 부족하지는 않은가.. 걱정이 되었으나, 그냥 성실함으로써 갈음하기로 했다.


어차피 방송이 컸으면 하는 바람보다는, 날 봐주는 사람이 몇 분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오겠지. 어떤 계기로 확 떠오를 거야. 그날을 기다리자! 하면서.


근데 그거 거짓말이었다.


진짜 웃긴 게 내가 나 자신을 속였던 거다.


몇 분만 봐주시는 걸로 족하다고? 아니었다.


나는 크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방송만 켜면 채팅창에 '캬'로 도배되고, '기다렸어요ㅜㅜ' 찐팬분들이 우루루 몰려오고,


또 쉴새없이 구독이 터지고, 도네가 터지는 그런 순간을 대수롭지 않은 듯 즐기는 대기업이 되고 싶었던 거다.


5월까지 전혀 성장이 없자 답답하고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왜 나는 운이 없지? 자낳대라든가, 이런 거 지원할 구멍이 없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바보같은 푸념들이다.


한켠으로는 아찔하기도 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때의 내가, 정말 운이 억수로 좋아서 자낳대에 참가했다면, 평생 우물 안 개구리가 됐을 것 같아서.



깨달음은 에어컨을 켜기 시작한 오뉴월 무렵부터 왔다.


나는 말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개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약간의 논리가 존재하긴 하는 그런 개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웃기게도 그게 먹혔다.


시청자분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그무렵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평균시청자수는 늘어나는데, 실제 내 방송에 한번이라도 오셨던 분들의 수는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평소 내 방송을 1시간 보시던 분이 2시간, 3시간 보게 되셨다'라는 의미로,


채널고정!하는 분들이 증가했다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더 쉽게 말하자면 방송의 질이 상승했다는 뜻. 그러니까 이제 좀 볼만하다고.


반면 지표상 부정적인 사실도 있었는데, 바로 유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늘 오시던 분들만 오신다고.


하지만 이는 유튜브라는 개사기 치트키로 정말 쉽게 해결이 가능했다.


편집 빡세게 하기 시작하니까 진짜 바로 해결됨.



이 무렵부터의 내 방송실력(?)은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늘 비슷한 방송을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로 유입을 늘리고 트위치생방에 정착시키는 일을 계속 반복, 지금은 시청자가 바닥을 기어도 700이고 많을 때는 1200이다.


진짜 코만 파고 있어도 700명의 시청자님들께서 봐주신다.



놀랍게도 그 모든 역사에 운이란 것은 없었다.


호스팅 한번 받은 적 없고, 대회나 이벤트? 얼씬한 적도 없다. 불러주는 데도 없었고. 핫클립 같은 게 빵 떠버린 적도 없다.



요즘 다시 내가 종종 팁을 얻곤 했던 트게더 같은 사이트들을 들락거려보는데,


가장 많은 얘기가 그거다.


우리 하꼬들은 운이 없어서 절대 못뜬다고.


대기업들이 돌려먹기로 시청자님들을 독식하고 있고, 이 카르텔은 뚫을 수가 없다고.


한마디 해주려다가 말았다.


그냥 평생 그렇게 살라고.



인방판에서 운이란 것은, 사실 상대적인 관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들 눈엔 '운'이었던 게 실은 그 사람이 손수 만들어낸 '인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대기업 A가 예전에 무명이었는데 핫클립 하나로 빵 떴다고 해보자.


트게더에는 이런 대화가 오가기 시작한다.


갑 : 대기업 A는 무명이었는데 핫클립 하나로 빵 뜸

을 : 그럼 너도 핫클립 빵 터지면 되잖아

갑 : 순수 운빨이라 안됨

을 : 그냥 니가 재미 없는 거 아니야?

갑 : 내 유튜브 하이라이트 보면 진지하게 A보단 훨 재밌음. 근데 사람들은 보던 것만 봐서 A만 봄


그러해서 내가 갑의 유튜브를 한번 방문해본다.


가서 둘러보니, 가관이다. 지 혼자만 재밌고 시청하는 나는 재미가 하나도 없다.


생방은 더더욱 가관이다.


일단 오디오가 50% 이상 빈다.


이게 참 중요한 문젠데, 아니아니, 됐다. 진짜 중요한 문제를 짚어줘야지.


쉽게 웃길 수 있는 상황을 침묵으로 넘긴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어, 저 상황에 이런 드립 한번 쳐주면 빵 터졌을 텐데' 하는 그런 순간이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버린다.


그냥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근데 그게 인방판에서는 실력이다.


1시간에 최소 10번은 그런 기회들이 오고, 지나간다.


이 10번 중 몇번을 잡아내냐가 실력이다.


핫클립이 '크리티컬 펀치'라면 생방의 이 꾸준한 드립은 '평타'다.


평타를 꾸준히 잘쳐줘야 한다. 그래야 딜량 1위도 먹을 수 있는 거다.


근데 그 평타각을 못보니까 긴 생방시간에 비해 재밌는 시간은 아주 짧다.


당연히 유튜브각도 보기 어려워진다.


10시간 내내 게임만 돌려서 리신궁에 나미가 하늘로 솟구쳐버리는 버그성 상황이 나오기만 기다리니, 뭐 어쩔까?


그거 한장면 나오면 얼씨구나 하고 '발차기 한번에 나미님 안드로메다 가셨습니다ㅋㅋㅋ' 이런 영상 올리는데, 별 의미 없다.


매순간 말을 하고 재밌어야 한다.


나 스스로가 컨텐츠가 돼야 하는 것이지, 그 역할을 게임에 맡기는 순간 끝이다.



사실 대기업 A는 역량이 있었다.


A의 방송을 가서 보니, 육각형으로 꽉 차기 직전의 훌륭한 방송인이었다.


게임에서 웃긴 순간이 안나와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웃겼다.


하꼬 시절 풀영상도 부채널에 있길래 한번 봐봤다.


역시나 기본기가 있었다.


매니저분이 혼자 채팅을 미시는데도 어색함 없이 분위기가 잘 살렸다.


그건 하꼬들이 흔히 말하는 '나는 시청자가 없어서 티키타카가 안돼요'에 대한 대답이었다.


티키타카는 권리가 아니다.


티키타카 없이도 뜨는 사람들이 나중에 티키타카도 하는 것이다.



나무가 오래 살고자 한다면, 결국 튼튼한 뿌리를 갖춰야 한다.


눈에 보이는 기둥만 커져봤자 뿌리가 없다면 잔바람에도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나 역시도 여전히 뿌리가 튼튼치 못한 사람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다시보기 피드백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게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들을 즐겨야 한다. 실제로 즐겁다.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구나 싶어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격적인 문장이 많습니다만 나쁜 의도는 아닙니다.


모든 방송하시는 분들, 박탈감 느끼지 마십시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방송해보니 딱 저것만이 사실이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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